CHA JONG RYE Solo Exhibition

Creation & Extension

2019. 6. 10 - 29

 

에너지의 꼴, 의지와 욕망의 사용법  

                                                                                                           고충환(미술 평론) 


 드러내기 드러나기 연작은 수동과 능동, 작가와 관람자만 있을 뿐 주어진 정보가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나의 제작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 결정하길 원한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일 수도 있고, 자연일수도, 우주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이 일상적 오브제의 무심한 나열에서 대양 한 지점에서 일어난 한 조각의 파도가 태풍으로 성장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2014년 작가노트). 

작가의 작업이 한창일 때(?) 작가가 쓴 노트다. 노트에서도 드러나듯 드러내기 드러나기는 시종 작가의 작업의 주제다. 드러내기 드러나기란 주제 속엔 다만 드러내기와 관련한 의지(드러내기)와 현상(드러나기), 능동(드러내기)과 수동(드러나기)이 있을 뿐, 무엇이 어떻게 드러났는지에 대한 관련정보가 없다. 그건 어쩜 행위(아님 운동성)와 관련한 최소한의 정황정보에 머문다. 그 와중에서도 분명한 건 여하튼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작가는 행위를 한다. 뭔가를 드러낸다. 그러나 작가가 제안하거나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작가의 행위를 통해 뭐가 드러났는지에 대한 것(의미부여와 의미의 해석)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주어진다. 
예술은 그 의미가 열려있다(움베르토 에코의 열린 예술작품). 예술의 열린 의미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지점은 작가가 아닌 독자에게서 이며(저자의 죽음), 이로써 예술은 비로소 완성된다. 그전에 예술은 다만 잠재적인 무엇, 가능적인 무엇, 아무 것도 아닌 미증유의 상태로 남겨진다. 작가가 제안하고 독자가 완성시키는 것이며, 작가가 열고 독자가 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독자는 단순한 독자가 아닌 또 다른 작가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를 작가적 텍스트와 독자적 텍스트로 구분했다. 저자가 결정한 의미 그대로를 독자가 단순히 답습(혹은 반복)할 뿐인 텍스트가 독자적 텍스트고, 저자의 텍스트를 읽는 내내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다른 저작을 쓰게끔 촉발시키는 텍스트가 작가적 텍스트다. 전자에 해당하는 전형이 공문서라고 한다면, 후자에 해당하는 텍스트는 시다. 시는 구조적으로 너무 헐거워서 행간과 이면과 여백을 모두 독자가 채워 넣어야 하고, 그 자체가 또 다른 텍스트(혹은 저작)를 파생시키는 것이다. 미셀 투르니에는 이런 능동적인 독자의 존재를, 작가와 독자와의 공모를 흡혈귀의 비상에 비유한다. 책을 펼치면 종이절벽 위에 깨알같이 매달려 잠자던 흡혈박쥐(활자)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독자의 피를 빤다. 피를 빨면서 쓰라리게 만들고, 미어지게 만들고, 먹먹하게 만들고, 아득하게 만든다. 피를 빨리는 효과(흡혈효과)다. 그렇게 투르니에에게 책의 작용은 상처를 만드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어쩜 예술은 상처의 기술일 수 있다. 드러내기 드러나기란 주제는 이처럼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 작품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사람들 저마다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질 상처를 예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작품의 의미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방기(혹은 포기)하고 있음에도, 정작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작품은 여하튼 무엇인가를 의미할 수 있다. 그게 뭔가.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강력하게 감지되는 것이 뭔가. 에너지다. 다른 말로 치자면 기운이고, 생명(그리고 생동)이고, 호흡이고, 운동이다. 에너지는 도처에 있다(에너지의 편재성). 존재하는 것치고 에너지 아닌 것이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흐르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흐르는 강물은 시간이다. 에너지다. 시간 자체가 이미 에너지의 한 존재방식이다. 에너지의 틀이다. 그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그리고 존재현상)가 에너지다.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과 같은 무한순환 반복하는 것들, 흐르는 것들, 이행하는 것들, 풍화와 흔적, 추락, 지세, 풍수, 역학, 나비효과, 우주의 배꼽, 태풍의 눈, 상호작용, 그리고 나아가 선한 기운과 사악한 기운, 심지어 기억과 회상 같은 무형의 심리현상이 모두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런 한 에너지들이다.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의 핵(모나드, 단자, 원자)으로부터 발원한 에너지가 존재에 미치고, 자연에 가닿으며, 우주로까지 팽창된다. 이처럼 흐르는 에너지, 무형의 에너지, 보이지도 않는 에너지, 그리고 여기에 분명 존재함에도 어떤 형태 어떤 색깔로 특정할 수 없는 에너지는 흔히 거대담론을 끌어들여 관념적으로 그리고 도상학적으로 표현하게 만들고, 실제로도 그렇다. 

여기서 작가는 자연현상에서 에너지를 발견하고 표현하는 점이 다르다. 정해진 형태도 색깔도 따로 없는 에너지에 물적 형식을 부여해 감각적 대상으로 전이시켜놓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담 작가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작가는 봄에 피는 새싹에서 에너지에 대한 최초의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단단한 흙의 표면을 뚫고 새싹이 싹을 틔우려면 그 끝이 송곳처럼 날카롭고 뾰족해야 한다. 실제로도 그렇게 생겼다. 그리고 작가는 이 경우를 일반화한다.
에너지를 형상화한다면 그 형상은 아마도 그 끝이 날카롭고 뾰족할 것이다. 새싹이 그렇고, 나무가 그렇고, 산이 그렇다. 문명사회로 치자면 마천루가 그렇고, 소통의 계기로 치자면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화술(다소간 공격적인?)이 그렇다. 
그리고 작가는 에너지의 또 다른 형태(꼴)를 제안한다. 이번에는 그 머리가 몽글몽글한 것이 다소간 우호적으로 보인다. 군락을 이룬 버섯 같고 곰팡이와 같은 균류를 보는 것 같다. 보기에 따라선 발끝에 이는 먼지의 결정체 같기도 하고, 우호적인 외관과는 다르게 버섯구름(아마도 그 속에서 핵분열과 융합반응이 격렬할)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렇게 몽글몽글한 에너지의 단자들이 모여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파문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는 비정형의 원 형상을 만들기도 하고, 음기와 양기가 상호부침 하는 태극형상을 만들기도 한다. 움직이는 에너지, 운동하는 에너지(에너지의 운동성)를 표현한 것이며,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존재의 동적인 양태를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움직임의 암시를 통해 다만 사물대상의 고정된 순간포착에 머물 뿐인 조각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킨 경우로도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에너지를 크고 작은 원뿔형태의 단자로 형상화했고, 정형 비정형의 원형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는 에너지의 운동성을 형상화했다. 그리고 여기에 웨이브 형상으로 나타난 또 다른 에너지의 존재양태를 부가한다. 마찬가지로 운
동하는 에너지를 표현한 것이란 점에선 같지만, 이번에는 그 운동성이 그려 보이는 패턴이 더 복잡하고 유기적이란 점이 다르다. 그 대략의 과정을 보면, 먼저 작가는 종이나 천 조각을 구겨 그 구김새를 본다. 반은 우연이 만든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필연이 만들어준 형상이다. 그 이미지 정보를 컴퓨터에 입력한 후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 형태 값 그대로의 원형을 얻는다. 그리고 원형(본) 그대로 확대된 조형물을 만드는데, 나무 패널을 슬라이스 형태로 접붙여서 만든다. 더러 수평으로 쌓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수직으로 쌓아 만든다. 그 과정에서 접합면에 균질의 선이 생기는데, 수평의 경우 그 선은 등고선처럼 보이고, 수직의 경우에는 산맥의 단층처럼 보인다. 최초 종이 조각이나 천 조각이 만든 형상이 산세로 그리고 산맥으로 확장되는 것이 에너지의 최소단위원소가 모여 태풍의 눈을 만들고 회오리를 만드는 것으로 확장되는 에너지의 운동성이며 자기 확장성에 부합한다. 
이처럼 작가가 표현해놓고 있는 에너지는 최초 발아하는 새싹에서 시작해 종래에는 산세로 그리고 산맥으로 확대 재생산된 것이란 점에서 다르다. 그 시작과 끝이 자연이라는 감각적 실재에 연유한 것이란 점에서 흔히 관념적으로 아님 도상학적으로 흐르기 쉬운 경우와 구별된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에너지와 함께 내면풍경의 표상으로, 특히 상처의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다. 외부를 향해 돌출된 형태를, 특히 원뿔형상을 에너지의 꼴을 형상화한 것으로도 그리고 그 자체 가시를 형상화한 것으로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어쩜 가시 자체가 에너지의 축도된 형태일 수 있고, 여기에 가시로 표상된 상처 자체가 이미 에너지의 한 경우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엔 남을 찌르는 가시가 있고, 나를 향하는 가시가 있다. 때로 가시는 방석에마저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부드러운 가시도 있다. 온통 가시가 돛은 소판데, 정작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가시라서 만져보면 부드럽다(실제로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만든 작품이다). 그렇게 작가는 남을 찌르고 나를 찌르는 가시를 형상화했고, 여기에 부드러운 가시, 본성에 반하는 가시, 역설적인 가시를 형상화했다. 찌르는 가시와 보듬는 가시를 형상화한 것이다. 사실 역설적인 경우로 치자면 에너지를 소재로 한 작가의 모든 작품에 적용될 수 있다. 선한 기운이 있고 사악한 기운(그리고 여기에 영적 기운)이 있는 것처럼 에너지는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가 판이해진다. 결국 에너지의 사용법이 문제다. 
다시 드러내기 드러나기로 나타난 작가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드러내기란 의지라고 했다. 의지는 욕망이다. 결국 어떤 욕망을 드러낼 것인가가 문제다. 그리고 그 욕망이 어떤 결과로 드러날 것인가(드러나기)가 문제다. 작가에게 드러내기 드러나기는 원래 작가와 관객의 문제로서 주어진 것이지만(작가는 다만 제안을 할 뿐, 그 의미부여며 해석은 관객의 문제), 종래에 그 주제는 에너지의 사용문제로 확장되고, 욕망의 용법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이 모든 걸 작가는 살과 피가 흐르는(나무는 꼭 살을 닮았다), 그리고 여기에 따뜻한 온기마저 느껴지는 나무로 조각했다. 섬세한 감성과 떨림이 오롯한 형상과 질감을 얻는 조각을 했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에선 심지어 찌르는 형상마저 온건하고, 가시마저도 부드럽다. 

 

© 1981-2019 PYO GALLERY

  • Grey Facebook Icon
  • Grey Instagram I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