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 Solo Exhibition

"노력하는 사람  (Endeavorer)"

2016. 3. 9 - 2016. 4. 4

가공되지 않은 날 것, 속박과 포박의 흔적

홍 경 한 │ 미술평론가

 

픽셀화 된 작품 이미지만 보고도 소위 ‘비평’을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비평이 하나의 장(場)에 놓이고 불특정 다수에게 읽혀진다는 사실에서 작가의 발언이나 텍스트, 실제 작품을 접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즉, 가치구분에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말과 정리된 글은 유의미한 자료라는 것이다. 더구나 작가를 물리적으로 만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유무형의 ‘증언’들은 더욱 요긴해진다. 때문에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작업실을 방문해 인터뷰를 하거나 작품을 실제로 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득이 그러하지 못하는 예도 없진 않다.

오래 전 비평을 쓴 바 있는 중국 작가 ‘치우 핑(Qiu Ping)’의 경우도 매한가지였다. 작가의 작품 의도와 작업 환경으로부터의 생생한 체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유효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었고, 따라서 물리적인 대면은 불가능했다. 그럴 경우 선택할 수 있는 건 통화나 서신을 주고받는 것 뿐.

이에 필자는 이메일에 몇 가지 궁금증을 적어 보냈다. 하지만 그는 내게 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 왔다. “나는 (내 작품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 것을 싫어한다.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대답하고자 노력할 것이지만 난 단지 작가로서 작업할 뿐이며, 말하지 않고 입을 닫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부디 작품이 스스로 말하도록 해 달라.”

그랬다. 그는 본인의 글과 말을 일종의 치장으로 여겼다. 말과 글 대신 ‘작품자체’를 봐달라고 주문했다. 그것이 여러 휘황한 수사에 앞선 실체임을 강조했다. 더구나 이메일 말미에 “좋은 작품은 설명을 위한 말을 따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신념에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5년 만에 또 한명의 작가에게서 유사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바로 채온 작가이다.

필자는 치우 핑의 경우에서처럼 채온 작가로부터 별다른 정보를 받은 게 없다. 워낙 말수가 적다 보니 간헐적 만남에서조차 심도 있는 대화는 지속되기 어려웠고, 그가 보내준 짧은 작가노트는 작가노트라기 보단 자신의 그림에 대한 그저 작은 소회 혹은 단상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니 필자는 오로지 맞춤법마저 엉성한 그 수필 같은 글을 참고로 하되, 작품만 보고 가치를 논하는 객관적비평을 통해 그의 작업을 해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것도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내.

그나마 채온 작가의 작품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작가노트를 보면 “(나의 그림은)설명할 수 없는 기운에 의해 온전히 나를 당시의 상황에 맡기는 것”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어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상태를 회화로 기록하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 놨다. 읽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흥미롭게도 200자 원고지 두어 장 밖에 되지 않는 글 속에 유독 ‘두려움’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용기’라는 낱말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언뜻 이해되지 않을 이 두 문장은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즉, “설명할 수 없는 기운에 의해 온전히 나를 당시의 상황에 맡기는 것”이란 작업을 대하는 데 있어 때론 무의식적인 측면이 그리기의 과정에 개입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더불어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상태를 회화로 기록하는 것”이라는 건 역설적으로 작업자체가 그에겐 두려움의 드러남일 수 있음과 동시에 극복의 대상으로 존재함을 지정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작가는 그림 앞에서 비결정적이고 유동적인 상태에 곧잘 젖어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정신현상이 그림 내에서 유보(留保) 혹은 가감(加減)되거나 보류(保留)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관점을 배경으로 그의 그림을 보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넘기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미완전한 속성을 지닌 작가의 독백이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머리로 그리는 것이라기 보단 의도치 않은 심리적 변주에 의한 표현에 가깝다는 것 역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표현을 포박하는 것은 무엇일까. 세 개의 예를 떠올릴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전의식이고 두 번째가 관계이며 세 번째가 행위이다.

이 중 첫 번째인 전의식(preconscious)은 무의식에 포함되지만 의식에 접근할 수 있고, 의식에 쉽게 다가설 수 있지만 단지 일시적으로만 무의식적인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으나 누군가가 어떤 내용을 언급했을 때 문득 생각나는 상황 등이 그렇다.

전의식의 내용은 무의식에 있던 본능욕구나 기억들이 1차 검열을 통과하고 전의식으로 나온 것들이며, 이는 외부 세계(external world)로부터 들어온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여기서 두 번째 포박인 ‘관계’가 생성된다. 관계는 사적이면서 내적인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위협해온 기억과 외부세계로부터 비롯된 모든 기억과 흔적 등이다. 이때 관계는 자의식을 생성하는 근본 단위이면서 현실에선 삶의 애중이자 갈등의 씨앗이다. 더불어 심리 저변에 내려앉은 불안과 외로움, 두려움과 초조함의 대치어일 수도 있다. 그는 이 ‘전의식’과 ‘관계’를 텃밭으로 예술적 ‘행위’를 구축하고, 행위는 다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선과 색깔, 형상 뒤에 숨겨져 있는 심상구현이라는 거푸집을 만든다.

그의 그림에서 자질구레한 설명이 배제되고 있는 건 행위를 외삽 하여 그림 자체와 작가 간 호환성과 기록의 권역을 되찾고 이를 통해 내재된 자의식을 반영하려는 의지가 특정한 ‘적시(摘示)’ 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있어 전의식과 관계, 행위의 무대는 그림이다. 거시적으로 이는 현존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무엇에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면서 미시적으론 살아 움직여야 비로소 사는 것이자, 살아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론 평범한 삶조차 두려움과 불안함일 수 있는 작가 개인의 현실과 굴곡진 삶의 여정과 속에서 움튼 아픔과 절망을 비롯한 기타 말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오늘날 채온의 그림은 단순한 시각적 묘사로 그치지 않고 자신을 기록하는 이미지의 채록이자 삶의 반영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는 방향에서 멈춰 있다. 따라서 채온의 그림들은 보여주기 위한 물감덩어리가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 존재성과 의미를 인지토록 하는 매우 충실한 매개임에 분명하다. 또한 내면과 마주하는 통로이자 거울이고, 반면 속박의 얼룩이다. 그는 이를 썩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의 그림이 독창적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사이톰블리의 그림 어디선가 본 듯한 여운, 안젤름 키퍼나 게오르그 바젤리츠 등의 독일 작가들에서 발견되는 분위기, 루시안 프로이트의 1940년대 작품과 줄리앙 슈나벨의 70-80년대 작품, 그리고 필립거스톤, 프랑크 아우어바흐, 뤼크 튀이만, 수잔 로덴버그, 에릭 하쳇 등의 옛 그림들이 줄줄이 연상된다.

엄밀히 다른 작품이고 내용도 판이한 경우가 많지만 처음 그림을 대면했을 때 어느 누군가의 무엇과 맞닿는 부분이 생성되고 지각으로 연결된다면 창의에 있어 고민해야할 이유로 부족함이 없게 된다. 물론 작가는 위에 기술한 예술가들을 모를 수도 있지만 “모른다”는 것이 설득의 조건은 아니며, 사실 몰라서도 안 된다. 동시대미술의 흐름에 있어 나와 동일한 세계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흔적’ 또한 나의 흔적만큼 유가치하며, 그들로부터의 이탈을 확인할 때 비로소 완전한 변별력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미학적 베이스를 보다 탄탄히 하려는 노력도 절대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예술가의 길이란 이처럼 쉬운 게 없지만 그가 언급한 ‘두려움’과 ‘용기’는 경험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음도 사실이요, 그것을 넘어설 때 진정한 두려움과 용기는 파쇄 된다.

© 1981-2019 PYO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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